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문단 편집) === 사망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inochet_muerto.jpg]] 생일 이틀 뒤인 [[2006년]] [[11월 17일]]에 피노체트는 쿠데타 당일에 체포되어 '죽음의 캐러밴' 시에 사살된 아옌데의 두 경호원에 대한 납치, 살해 혐의로 가택연금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12월 3일]]에 급작스럽게 심장마비가 발생하여 다음 날인 [[12월 4일]]에 가택연금이 해제되어 군병원의 중환자실로 이송된다. 그리고 현지 시간으로 [[2006년]] [[12월 10일]][* 아이러니하게도 이날은 세계 인권의 날이자 아내의 생일이었다.] 오후 2시 15분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91세로 사망한다. 가족들 말에 따르면 피노체트의 유언은 그날 생일을 맞이한 아내와 관련된 말이었다고 한다. [[칠레]] 정부에서는 피노체트의 [[국장]]은 불가함을 밝혔고 따라서 국가애도일 선포나 조기 게양도 없었다. 다만 병영에서 조기를 게양하는 건 막지 않았고 전직 군사령관이었으므로 군장을 치르는 건 허락했다. 아버지가 피노체트 정권 당시에 감옥에서 심장병으로 죽은 아픔을 겪은 당시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는 '''"피노체트의 국장에 참여하는 건 양심에 위배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피노체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악행에 대해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기 3년 전인 2003년에 있었던 88세 생일 무렵에는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3/11/26/2003112670342.html|자신을 '천사'라고 지칭하며 자화자찬하기도 했으며,]][* 물론 칠레에서는 '죽음의 천사'라고 비꼬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죽기 1년 전인 2005년 11월 16일에 DINA와의 연관성에 대해 물어본 인터뷰에서도 [[https://www.theclinic.cl/2012/07/30/no-me-acuerdo-pero-no-es-cierto-no-es-cierto-y-si-fue-cierto-no-me-acuerdo/|"기억이 안나지만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니고 사실이었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취지를 시종일관 유지하는 등]] 엄청난 망언들을 남겼다.[* 피노체트는 이외에도 "인권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매우 현명한 발명품이다.", "인권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망각이다."라는 말도 남겼으며, 자신의 인권 탄압으로 인한 희생자들에게 사과할 거냐는 질문에 "용서를 구하라? 용서를 구하게 하라."는 막말도 남기기도 했다. 여담으로 피노체트의 변호사도 [[유유상종]]인지 [[1999년]] [[1월]]에 [[http://news.bbc.co.uk/2/hi/264221.stm|'''고문은 반인도적 범죄가 아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그가 죽었을 때 [[칠레]] 현지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파일:external/bb5aab7e57d1aaf33a429de801cd648ce2db268d88ef5ded815b4a9a976ff8f8.jpg]] 민주화 세력과 이들의 지지자들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고, [[파일:external/media1.s-nbcnews.com/061203_pinochet_hmed_4p.grid-6x2.jpg]] 피노체트의 지지자들은 침통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이 [[칠레]] 전역에 방송을 통해 알려지자 피노체트가 입원한 병원 정문 앞에는 경찰 수십 명이 배치되었고, 정문 앞 인도에는 피노체트의 열성 지지자 수십 명이 피노체트 사진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그들은 피노체트 사진 위에 ‘INMORTAL’(불사)라는 글씨를 보이면서 피노체트를 영원히 죽지 않는 신으로 믿고 있었다고 취재진들은 증언했다.] 병원 정문 앞 잔디밭에는 장기간 취재할 마음을 먹었는지, 칠레 취재진들이 아예 짐을 풀어놓고 대기하고 있었고, 병원에서는 취재진의 병원에 출입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취재진들은 피노체트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출입하면 모두 이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몰려갔으며 이런 지루한 기다림 끝에 피노체트가 그날 정오에 사망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러자 그가 위독하다는 방송이 처음 나갔던 이틀 전과는 달리 병원 앞에는 수백 명의 시민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으며 병원 주변은 아예 이동하는 것이 차단됐다. 심지어 기마경찰까지 동원된 수백 명의 경찰들이 계속 불어나는 인파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대부분 칠레 국기와 피노체트의 사진을 들고 병원 앞에 모여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고마워요, 피노체트’라고 쓴 피켓을 든 여성들과 ‘고마워요, 나의 장군’이라고 쓴 머리띠를 두른 젊은 남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궁이 위치한 시내 중심가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피노체트의 죽음을 환영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경찰과 충돌했고 거리 곳곳에서 타이어나 나무를 태우거나 시위대가 보도블록을 깨서 경찰들에게 던지기도 했다. 시위는 밤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피노체트의 장례식이 열리던 12월 12일에 산티아고 거리는 시위로 인한 다툼 하나 없이 평온했다고 한다. 오전부터 대통령궁인 ‘모네다’앞의 광장에서는 약 5천 명이 모였는데, 그들의 상당수는 피노체트 시기 가장 집중적인 탄압을 받은 [[칠레 공산당]]의 당원 및 지지자들이었다.[*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은 뒤 죽인 공산당원 수는 1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노체트 정권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늙은 공산주의자들은 피노체트 사망 축하 집회를 열면서도 죽어갔던 동료들로 인한 슬픔이 배어있었다고 취재진은 전했다. 집회가 끝나자 이번에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피노체트의 사망을 축하하는 춤판을 벌였다. 한편, 칠레의 육군군사학교에서는 피노체트의 장례식이 [[군인장]]으로 치러졌다. 많은 군인들이 여전히 피노체트를 군의 최고지휘자로 예우하는 모습이었으며 그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약 5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칠레의 국방장관이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정부가 [[국장]]을 반대했다는 것에 분노하며 국방장관에게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또한 장례식 도중에는 피노체트의 가족들이 나와 피노체트를 "칠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피노체트의 유족들은 피노체트의 유해를 군부대에 안장하기를 원했지만, 군 당국이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때문에 피노체트의 유해는 자기 무덤이 정적들에게 파헤쳐질 것을 염려했던 피노체트의 유지에 따라 화장된 후 산토도밍고 로스볼도스의 가족 땅에 묻혔다. 그리고 40년간 유지된 칠레 헌법은 2019년 10월에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가 사회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시위로 확대되며 민심에 의해 불평등의 씨앗으로 지목되었고, 결국 현지시간으로 2020년 10월 25일에 부쳐진 국민투포에서 78%의 압도적 지지율로 개헌이 결정된 후 2022년 5월에 새 헌법 초안이 발표되었으나, 사실상 강요에 가까운 급진적인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론이 악화되어 결국 2022년 9월 5일자 국민투표 결과, 게헌 찬성 38%에 개헌 반대 62%로 개헌은 부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